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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리뷰] <86 -에이티식스->가 선사하는 ‘연출의 정수’

오영록2023.01.26

애니메이션에 있어 연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는 것에 이론의 여지는 없을 것이다. 특히 일본 애니메이션의 경우 라이트 노벨, 만화 원작을 애니메이션화하는 경우가 많기에 더욱 그러하다. 이 경우 고정된, 혹은 큰 변화를 줄 수 없는 스토리 내에서 그것을 어떠한 방식으로 관객에게 보여주느냐, 이것이 애니메이션의 퀄리티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어떤 애니메이션의 연출을 평가한다고 했을 때, 사람마다 그 기준이 다를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좋은 연출이란, 직관적으로 봤을 때는 작품에의 몰입을 도와주고, 세심히 살펴보았을 때는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도를 높여주는 연출이다. 직관적이지 않은 연출은 작품을 가볍게 즐기는 관객들에게 해석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위화감을 느끼게 하고, 작품 이해와는 크게 상관없이 상황에의 몰입만을 위한 연출만으로는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작품의 깊이를 중요시하는 관객의 경우, 다소 해석이 어렵더라도 연출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기에 몰입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품 감상에 공을 들여야만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을 좋은 작품이라 할 수 있을까? 모두가 그것이 가능한 것도 아니며, 그러해야 할 이유 또한 없다. 더욱이 일본 애니메이션의 특성상 상대적으로 작품의 상업성이 중요시되는 부분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1)

 

그런 측면에서 본고에서 다룰 애니메이션 <86 -에이티식스->는 필자가 주장한 좋은 연출의 기준 두 가지가 장면에 맞게 적절히 나타난, 연출의 정수를 보여준 작품이라 평하고 싶다. 필자는 본고 작성에 앞서 해당 작품을 총 3회를 시청하였다. <86 -에이티식스->가 보여준 연출은 1회차 때는 상황 몰입과 등장인물들의 감정선 이해를 충실히 도와 큰 여운을 남겼다면, 2회차와 3회차에서는 연출에 녹아 있는 의도가 이해되며 또 다른 놀라움을 선사했다. 때문에 본고를 통해 필자가 고평가하는 <86 -에이티식스->의 연출에 대해 기술해 보고자 한다.

 

애니메이션 <86 -에이티식스->는 라이트 노벨 <86 -에이티식스->를 원작으로 하는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산마그놀리아 공화국(이하 공화국) 소속 지휘관 블라디레나 밀리제(이하 레나)와 공화국에 의해 핍박받고 전쟁에 내몰린 스피어헤드 전대 소속 에이티식스들이 자율형 병기 세력 레기온에 맞서며 일어나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공화국은 자유, 평등, 박애, 정의, 고결함을 내세우면서도 백계종을 제외한 인종을 차별하여 공화국 국경 지역인 86구로 몰아냈다. 공화국은 이들을 에이티식스라 부르며 레기온에 의한 에이티식스 전사자를 인간이 아니라 여기고 연일 전사자가 0명임을 보도한다. 이런 공화국과 다르게 레나는 에이티식스를 인간으로 여겨 스피어전대 지휘관으로서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에이티식스와의 소통을 통해 교감한다.

 

1. 누구나 체감 가능한 연출



                                               

                                                                            그림 1,2. 떨어지는 슈크림 빵과 효과음, 그리고 갑작스러운 장면 전환



그림 1, 211화의 한 장면으로, 슈크림이 떨어지며 부서지는 소리와 동시에 에이티식스 대원이 사망하는 장면으로 넘어가는 부분이다. <86 -에이티식스->에서는 이러한 갑작스러운 장면 전환이 자주 연출되는데, 이 장면 역시 그 중 하나로써 고평가받고 있다. 해당 장면에서는 슈크림이 부서지는 효과음을 참혹한 사망 효과음과 일치시켜 누구나 연출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설정과 스토리 전개 측면에서 보아도 태평한 산마그놀리아 내부의 일상과 국경의 전장을 극명하게 대비시켜 관객들로 하여금 이를 확실히 체감할 수 있게 해준다. 요컨대 모두가 직관적으로 체감 가능한 연출을 통해 상기한 필자의 두 가지 기준을 모두 충족하고 있다.

 

갑작스러운 장면 전환은 자칫 잘못하면 관객들로 하여금 위화감이 생기게 할 수 있다. 원작을 애니메이션화한 여러 작품이 분량 조절 실패 등을 이유로 부자연스러운 장면 전환을 자주 남발해 많은 비판을 받았던 것2)을 생각하면, <86 -에이티식스->의 여러 갑작스러운 장면 전환이 고평가의 이유가 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또한 <86 -에이티식스->의 전개 속도가 매우 느린 것으로 평가되고 있음에도 고평가를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불필요한 장면을 자연스럽고 효과적으로 없앴다는 것을 시사한다. 


2. 모두가 생각해낼 순 없다면 위화감이 없도록



 

                                                                                  그림 3. 주인공 레나가 상관에게 일침을 듣고 있다



그림 31 6화의 한 장면으로, 레나가 상관 제롬 칼슈타르(이하 제롬)에게 전투로 인해 전사자가 발생했음을 보고하며, 요격포3)의 사용 허가를 요청하고 있는 장면이다. 그러나 제롬은 요격포 사용을 위해서 공화국이 감수해야 할 위험성을 언급하며 이를 기각하고 있다. 위험성 자체보다도 에이티식스를 위해 위험을 감수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지원이 필요한 스피어전대에 오히려 새로운 전투 임무를 내리며 레나에게 압박을 가하고 있다. 해당 장면은 에이티식스의 훌륭한 연출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사진을 살펴보면 의자의 장식이 클로즈업되어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필자가 언급한 두 가지 기준을 통해 생각해보자.

 

사진을 살펴보면 의자의 장식이 매우 날카롭게 그려져 있다. 레나가 제롬에게 압박받고 있는 상황과 레나의 감정을 생각하면 이는 상황 몰입을 도우면서도 매우 자연스러운 연출이다. 여기에 장식이 레나의 목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연출의 깊이를 더욱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장식이 목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못했더라도 이 장면을 통해 아무런 위화감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큰 중요성을 느끼지 못할 수 있는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주장한 두 가지 기준을 모두 충족하는 수준 높은 연출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3. 위화감이 불가피하다면 최대한 깊이 있게 연출

 

 


                                                                그림 4,5,6. 레터박스를 이용한 실험적인 연출, 그리고 끝내 눈물을 쏟아내는 신에이




그림 4, 5, 6 211화의 레나와 신에이 노우젠(이하 신에이)의 재회 장면이다. 각각 스피어전대 지휘관과 전대장4)으로서 특별히 교감하던 두 주인공은, 모종의 이유로 헤어져 해당 장면 전까지 상당 분량 동안 연락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이 주인공 신에이는 전우를 잃어가며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하고 망가져 간다. 그랬던 그는 죽음을 무릅쓴 임무 끝에 우연히 레나와 만나게 되고, 레나는 신에이를 비롯한 에이티식스 대원들을 기억하며 자신이 싸워나가는 이유를 밝힌다. 그런 레나를 보고 신에이의 망가지고 있던 마음은 움직인다. 캐릭터의 감정이 중요시되는 <86 -에이티식스->에서도 그 감정이 절정에 치닫는 장면으로, 필자가 <86 -에이티식스->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림 7,8. 이시이 토시마사가 조감독으로 참여한 애니메이션 <나만이 없는 거리>의 레터박스 활용



재회 장면의 이전 장면부터 신에이의 과거와 감정이 묘사되며 이전까지는 없었던 레터박스가 등장한다. 레터박스는 화면 비율을 조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검은 공백으로, 레터박스에 자막 등을 표시하는 경우는 많으나 위와 같이 연출적으로 사용한 경우는 드물다. <86 -에이티식스->의 감독 이시이 토시마사는 필자 개인적으로도 호평하고 있는 애니메이션 <나만이 없는 거리>에 조감독으로 참가하여 레터박스 연출을 사용한 경력이 있다. 그림 7은 주인공이 살인의 누명을 쓰고 경찰로부터 도주하는 장면으로, 이때 갑자기 주인공이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나타나는 과거의 장면부터는 그림 8과 같이 레터박스가 생긴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나만이 없는 거리>에서는 과거의 시점을 레터박스 연출을 통해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86 -에이티식스->와 같이 레터박스 위로 캐릭터가 그려지거나 서서히 사라지는 등의 적극적인 활용은 나타나지 않았다.

 

연출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기법이 있지만 프레임의 구조를 깨는 연출은 그중에서도 굉장히 실험적이고, 그런 만큼 필자가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는 위화감을 형성할 우려가 크기도 하다. 위화감은 왜 저런 연출을 사용했는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직관적인 이해와는 거리가 멀기에, 상기한 작품을 가볍게 즐기는 관객들까지 이해시키지 못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터박스 연출을 사용한 이유는, 그만큼 제작진의 의도가 강하게 담겨있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림 9. 레터박스를 넘자 잘려나가는 신에이의 팔

 

 

 주인공 신에이의 과거와 감정이 묘사되는 장면부터 레터박스 연출이 사용되었다는 것, 그리고 신에이의 마음이 망가지고 있던 것을 생각해 볼 때, 레터박스가 상징하는 것은 신에이의 마음을 가두는 어떤 무언가라고 할 수 있다. 그림 9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신에이는 레터박스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나 그림 4를 보면 레나는 신에이의 마음을 가두는 레터박스의 틀을 깨고 다가간다. 이를 통해 신에이의 마음을 가두던 레터박스는 서서히 사라지고, 신에이는 끝내 울음을 쏟아낸다.

 

필자의 해석과 제작진의 의도가 일치한다면, 절정에 해당하는 이 장면에서 위와 같은 레터박스 연출을 사용한 것을 고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스토리 측면에서 레나가 신에이의 감정선에 미친 영향은 이 장면 이전까지도 핵심적이었고, 레나가 레터박스를 넘어서 신에이에게 살아갈 이유를 알게 해주는 것 자체가 이 애니메이션의 핵심 주제의식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전까지의 연출이 비교적 직관적이고 자연스러웠기에 더욱 파격적으로 보이는 레터박스 연출은 가장 중요한 장면에 임팩트를 더하고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4. 내 인생 최고의 애니메이션, <86 -에이티식스->

 

 


                                                                                   그림 10,11. 레나를 보여주고 있다가 바뀌는 시점



 본고의 작성에 앞서 여러 <86 -에이티식스-> 관련 해석 자료를 살펴보았는데, 그중에서 여러 생각을 해보게 한 해석이 위 장면과 관련된 해석5)이다. 그림 10, 1113화의 장면으로, 레나가 스피어헤드 대원의 전사에 유감을 표하고 있는 장면이다. 이에 전투에서 생존한 대원 세오토 릿카는 레나의 말이 방관자로서의 동정이라며 악담을 퍼붇는다. 그리고 악담의 마지막 대사가 레나에게 일침을 가한다.

 

 

"애초에 너는 우리의 진짜 이름조차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잖아!"6)

 

 

이 장면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굉장히 훌륭한 연출을 보여주었음을 알 수 있다. 분노에 섞인 릿카의 대사와 패닉에 빠진 레나의 표정과 몸짓, 심각한 배경음악 등은 직관적임과 동시에 상황이해를 도와 본고에서 언급한 좋은 연출의 기준에 부합하고 있다. 특히 배경음악이 없다가 갑자기 재생되는 배경음악은 분위기를 전환시켜 릿카의 분노와 레나의 참담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본고 작성에 앞서 살펴본 해석과 더불어 필자가 다루려고 하는 해석은 이 장면뿐만이 아닌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에 관한 것이다.

 

이 장면에서는 레나를 보여주다가 갑자기 그림 11과 같이 레나가 전혀 보이지 않는 구도로 전환된다. 마치 애니메이션을 시청하고 있는 관객의 시점처럼 말이다. 이 해석이 맞다면 관객이야 말로 에이티식스의 죽음조차 유흥거리인 진정한 방관자이다. 작품을 감상하며 수십명의 스피어헤드 전대원의 이름을 전부 외우려 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관객에게 있어 에이티식스는 그저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등장인물 중 하나일 뿐이다. 이렇게 생각했을 때 이 작품의 핵심 주제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림 12. 그림 5와 같은 사진. 신에이가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레나, 그리고 관객이다.

 

 

 사실 이 해석을 처음 봤을 때 쉽게 동의할 수는 없었고, 그럴 여지가 있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11화를 기점으로 이 해석에 확신이 들었다. 상기한 대로 신에이는 11화 이전까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고통받는다. 신에이에게는 최후까지 남아 죽은 동료들을 데려간다는 장의사(언더테이7))서의 역할이 있었지만, 비교적 의연했던 작품 초반부와는 다르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죽어가는 동료들과 죽은 형과의 일들로 인해 마음이 꺾여갔다. 관객이라면 누구나 고통받던 신에이가 삶의 의미를 찾길 원했을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11화에서 레나가 필자, 그리고 관객이 하고 싶었던 말을 전한다. 그리고 그림 12를 보고 신에이가 레나를 바라보고 있지만, 동시에 관객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86 -에이티식스->는 레나를 통해 방관을 넘어 진정한 이해자가 되도록 만든 것이다.

 

 애니메이션 감상은 필자에게 그저 유흥이었다. 제대로 된 비평을 시도해 본 적도 없었고, 그럴 능력도 없었다. 그저 애니메이션이 주는 직관적인 즐거움의 크기로 명작이니 아니니 주장할 뿐이었다. 물론 상기했듯이 직관적인 즐거움도 작품의 중요 요소이다. 그러나 <86 -에이티식스->가 보여준 연출은 직관적인 것과 더불어 그 이상의 것을 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위의 두 장면을 보고 <86 -에이티식스->가 필자 인생 최고의 애니메이션이라 확신하였고, 이 글을 작성하고자 마음먹게 되었다. 또한 필자처럼 애니메이션이 그저 유흥이거나 유흥이었던 관객, 그리고 애니메이션에서 진정한 미학을 추구하는 관객 모두에게 이 작품을 강력히 추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1) 일본 애니메이션의 상업성과 관련하여 해당 논문을 참고해 볼 만하다: 송영민, 강준수, 2016, “오타쿠 문화에 대한 고찰”, 일본근대학연구, 54, p.342.

2) 이러한 애니메이션의 대표적 예시로 <약속의 네버랜드 2>, <오버로드 Ⅱ>를 들 수 있다.

3) 작중에서 요격포는 에이티식스가 탑승한 병기에 비해 압도적인 화력을 갖춘 것으로 묘사된다. 이는 에이티식스가 공화국에 반기를 들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4) 설정상 백계종인 지휘관은 전투에 직접 나서지 않는다. 지휘관은 전황 보고를 바탕으로 실시간으로 명령하지만 현장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에이티식스 중 한 명이 전대장이 되어 지휘관의 명령을 바탕으로 현장을 통솔한다. 이러한 간접 지휘 체계는 후술할 갈등의 원인이 된다.

5) 애니메이션 스트리밍 사이트 라프텔의 베스트 댓글 내용. 익명인 만큼 신뢰성은 확실하지 않으나 해석의 여지가 있다 판단하여 참조함. / 출처 : 라프텔, 86 -에이티식스- 3, https://laftel.net/player/40269/46216 (202318일 최종접속).

6) 에이티식스의 지휘관은 대원들을 코드네임으로 부른다. 작품 내에서 그 이유가 묘사되는데, 지휘관이 단명하는 에이티식스 대원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로써 나타난다.

7) 신에이의 코드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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