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한국의 지하 아이돌
지하 아이돌을 좋아하게 된 지도 어느덧 4년이 흘렀다. SNS를 통해 우연히 접하게 된 지하 아이돌은 애니메이션 캐릭터처럼 귀엽고 모에한 이미지를 지니면서도, 케이팝 아이돌처럼 현실에서 무대를 즐기고 만날 수 있다는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호기심에 방문한 첫 라이브는 발렌타인데이 라이브였다. 무대에 오른 아이돌은 메이드 복, 초콜릿 포장지를 본떠 만든 의상을 입고 등장했고 콘셉트에 충실한 의상과 퍼포먼스는 아이돌의 귀여움을 드러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아이돌과 관객의 합이었다. 팬들이 응원봉을 내밀면 아이돌은 응원봉을 잡고 눈을 맞추며 노래를 불러준다. 노래에 맞춰 응원 구호를 외치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었다. 아이돌을 뒤로한 채 관객들끼리 원을 그리며 응원 구호를 외치는 모습도 보였다. 그 모습은 공연이 아이돌만의 것이 아닌, 아이돌과 관객이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곳은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아이돌의 세계와는 전혀 달랐다.
1. 지하 아이돌
지하 아이돌이란 말 그대로 방송이나 잡지 등 메이저 매체에 출연하지 않고 라이브 공연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아이돌을 의미한다. 주로 지하에 있는 소규모 공연장, 라이브 하우스를 통해 활동하므로 ‘지하 아이돌’이라고 불린다. 최근에는 ‘지하’라는 표현 대신 라이브 아이돌, 인디 아이돌 등의 용어가 사용되기도 한다.
지하 아이돌의 활동은 소규모 라이브 공연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공연 이후에는 아이돌과 함께 사진을 찍거나 굿즈를 판매하는 방식으로 수익을 창출한다. 이러한 구조는 케이팝 아이돌과는 다른 비교적 자율적인 방식의 아이돌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지하 아이돌의 가장 큰 장점은 접근성이다. 대형 아이돌 콘서트의 경우 평균 티켓 가격이 약 12만 원인 반면, 지하 아이돌 공연은 평균 2만 원 내외의 저렴한 비용으로 관람할 수 있다. 인기가 많은 아이돌이 단독 라이브를 하는 경우도 2만 5천 원을 넘지 않는다. ‘무전겐바’라고 하는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라이브도 있어 부담 없이 접근하기 쉽다. 여러 아이돌이 함께 공연하는 경우가 일반적이기에 한 번에 여러 팀의 공연을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공연이 끝난 이후 ‘물판’을 진행하는 것이 지하 아이돌의 또 다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물판’은 아이돌의 굿즈나 특전권을 판매하는 시간으로, 특전권을 구매하면 아이돌과 함께 사진을 찍고 일정 시간 대화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이는 아이돌과 가까운 거리에서 교류 함으로써 팬과 아이돌의 거리를 줄이고 친밀감을 느끼게 한다. 아이돌이 팬을 대하는 태도가 쌀쌀하다면 팬서비스가 소금처럼 짜다는 의미의 ‘시오대응’, 반대로 다정하다면 팬서비스가 신처럼 은혜롭다는 의미의 ‘카미대응’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실제로 교류회를 계기로 선호하는 아이돌이 바뀌는 경우가 많아, 팬의 말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거나 작은 선물을 건네는 아이돌도 많다. 나의 경우, 겉모습만 보고 특정 멤버에게 호감을 가졌으나 물판에서의 대응이 생각보다 아쉬워 대응을 잘해주는 멤버의 물판을 더 많이 갔던 경험이 있다. 현재 좋아하는 아이돌은 대응이 매우 좋아 화이트데이 같은 기념일에 직접 만든 초콜릿을 선물로 주기도 한다.
<그림1> 물판회 체키(폴라로이드 사진)
이 외에도 다양한 교류 방식이 존재한다. ‘특의(특별의상)’을 지정하여 메이드 복, 코스프레, 할로윈 의상 등을 입고 무대를 선보이는 이벤트를 진행하기도 하며, ‘오프회’라는 별도 교류 행사에서는 선착순 응모를 통해 비용을 지불한 팬들이 아이돌과 함께 술자리를 가지거나 놀이공원을 가는 등 일상적인 시간을 공유한다. 공연 예매 과정 또한 팬과의 교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공연을 예매할 때 특정 아이돌을 지정하면 ‘메아테’라고 하는 지정 특전을 주는데, 특전권이나 샤메(셀카) 촬영권과 함께 포인트를 주는 것이 보통이다. 포인트는 이후 또 다른 교류로 이어진다. 특정 포인트를 사용하면 아이돌과 인생 네컷을 촬영하거나 개인 티셔츠를 제작해 주는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제도는 팬의 반복되는 참여를 유도하며 아이돌과 팬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시키는 역할을 한다. 지하 아이돌은 공연만 하는 존재가 아닌 팬과의 끊임없는 교류 속에서 만들어지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지하 아이돌의 또 다른 특징은 활동의 이동이 자유롭다는 점이다. 지하 아이돌은 ‘은퇴’ 대신 ‘졸업’이라는 제도를 통해 아이돌로서의 활동 종료를 표현한다. 이는 아이돌 활동이라는 인생의 한 부분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졸업은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아이돌로서의 활동을 종료하겠다는 의미의 졸업과 현재 소속 되어 있는 팀에서 활동을 종료하는 의미의 졸업이다. 후자의 경우 졸업 이후 다른 팀으로 이적해 합류하거나 새로운 팀을 만들어서 재데뷔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아이돌 활동을 졸업한 경우에도 다시 복귀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지하 아이돌은 유닛 활동 또한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소속 팀 활동과 별개로 이루어지는 유닛 활동은 다른 팀에 있는 친한 아이돌들과 컨셉 등을 고려하여 만들어진다. 팀이 해체된 후에도 유닛 활동만으로 아이돌 생활을 이어 나가는 아이돌도 적지 않다. 이를 통해 지하 아이돌은 특정 팀에 고정되지 않고 자신의 개성과 맞는 다양한 형태로 아이돌 커리어를 이어나갈 수 있다.
2. 지하 아이돌의 역사
1990년 초중반, ‘아이돌 빙하기’를 맞으며 기존 가수 활동을 하던 아이돌들은 배우, CM 등의 다른 형태로 활동하게 된다. 이 시기 메이저 방송에 출연하는 것이 어려워진 아이돌들이 노상이나 홀과 같은 라이브 하우스를 중심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공연을 하는 라이브 하우스가 주로 지하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들을 ‘지하 아이돌’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지하 아이돌의 원조로 토쿠나가 아이, 시시도 루미 등을 언급한다.
이후 2000년대 후반 아키하바라에서 활동하던 AKB48이 메이저 시장에 진출해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게 되면서 지하 아이돌의 수가 급격하게 증가한다. 아키하바라를 중심으로 형성된 오타쿠 문화와 결합하며 ‘만날 수 있는 아이돌’이라는 개념이 일본 사회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이는 아이돌이 무대 위에서만 존재하는 대상이 아닌, 직접 대화하고 교류할 수 있는 존재로서 인식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SNS의 확산은 지하 아이돌 문화의 성장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온라인 활동을 통해 자신을 홍보하고 팬을 모집하는 것이 더 쉬워지기 시작하면서 특정 지역이나 국가에 한정된 형상이 아닌, 전 세계로 확장된 서브컬쳐 문화로 자리 잡게 되었다.
3. 한국 지하 아이돌
이 문화가 국내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2019년 전후이다. 일본의 지하 아이돌 문화를 모티브로 하여 팀명을 일본어로 정하고 일본 아이돌의 노래를 부르며 자기소개를 할 때에도 일본어를 사용한다. 2025년이 된 현재는 약 70여 팀이 존재하며, 많은 아이돌이 해체하고 새롭게 데뷔하고 있다. 아이돌 활동을 생업으로 삼는 일본의 아이돌과는 달리 취미로 활동하는 멤버들이 대부분이다. 대학이나 회사를 다니면서 아이돌 활동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최근에는 고등학생 아이돌도 증가하여 학교를 다니며 공연을 병행하는 아이돌이 늘고 있다. 특전권을 여러 장 사용하면 할수록 아이돌과의 교류 시간이 증가하는 일본과는 달리 여러 장의 특전권을 사용해도 교류 시간이 추가되지 않는다는 차이점이 있다. 이는 아이돌 활동이 전업이 아닌 경우가 많아 멤버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한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제한된 시간 내에 더 많은 팬을 참여시키고자 하는 상업적 목적도 작용된 것이라고 추측한다.
일부 아이돌은 셀프 프로듀싱을 통해 자체적으로 곡을 만들거나 의상을 제작하며 활동한다. 이때 의상은 일본 아이돌의 스타일을 참고하여 만들어진다. 일본어로 된 노래를 만드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오리지널 곡은 한국어로 제작된다. 지하 아이돌 전용 회사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수소 엔터테이먼트’, ‘라이브아틀리에’ 등이 있는데 이 두 회사의 경우, 라이브 하우스를 직접 운영하여 공연 공간을 제공한다는 특징이 있다. 규모가 큰 아이돌이 회사에 소속되는 경우가 많으며 회사의 자체적인 오디션을 통해 멤버를 모집하여 데뷔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소속이 없는 자체 프로듀싱 그룹으로 SNS를 통해 자체 모집으로 팀을 구성하면서 활동을 시작한다. 이는 자유로운 활동이 가능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으나 개인의 선택과 책임이 중요하다는 특징을 보여준다.
지하 아이돌 문화는 여전히 대중적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이 문화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은 아이돌이 아닌 중·장년의 남성 오타쿠, 이른바 ‘아저씨 오타쿠’들이다. 실제로 아이돌은 10대, 20대의 젊은 여성이지만 팬층은 40대, 50대 남성이 주를 이룬다. 이들의 아이돌을 향한 성희롱, 스토킹과 같은 문제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내가 다니고 있는 그룹에서도 이러한 문제로 블랙리스트에 오른 관객이 존재하며, 나 역시 공연을 보거나 물판 줄을 설 때 아저씨 오타쿠들로 인해 불편함을 느낀 경험이 있다. 규칙을 지키지 않거나 1열에서 공연을 보기 위해 다른 팬들을 밀치는 모습도 목격된다. 이 때문에 SNS에서는 지하 아이돌 팬 문화를 과격하고 폐쇄적인 문화라고 판단하는 글이 올라오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회사나 운영팀의 태도다. 일부 관객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팬들의 목소리와 불편함을 호소하는 멤버들의 의견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팀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운영팀이 신속한 조취를 취하는 경우 현장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 결국 이 문화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아이돌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성실하지 못한 아이돌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운영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팀 또한 마찬가지다. 꾸준하게 진정성을 보여주는 아이돌은 규모와 상관없이 팬들과의 관계를 유지해 나간다. 내가 응원하고 있는 아이돌은 학업 문제로 2~3개월만에 만나게 되어도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며 반갑게 맞이해준다. 직접 찾아가지 못하는 날에는 SNS를 통해 답글을 남기는 등 항상 팬을 생각하고 있다는 마음을 전해준다. 단순히 공연을 소비하는 문화가 아닌 사람간의 관계로 형성되고 유지되는 문화인 것이다.
<그림2> 한국 라이브 하우스 ‘GEEK’
대부분의 아이돌은 신촌, 홍대의 쇼규모 라이브 하우스에서 활동한다. SNS를 통해 라이브를 예매하며, 당일 현장 예매도 가능하지만 빠르게 매진되는 경우가 많아 대다수의 경우 인터넷으로 예매한다. 팬들은 공연 중 아이돌의 직캠을 촬영하여 SNS에 공유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에게 팀과 아이돌을 알리는 기회를 만든다. 이러한 방법으로 새로운 팬을 유입시키는 구조가 형성된다.
한국의 지하 아이돌은 일본을 모티브로 하면서도 한국어 오리지널 곡과 자체 활동으로 독자적인 색을 만들어가고 있다. 현재, 국내 서브컬쳐 문화 속에서 주목을 받으며 서울 코믹월드와 함께 서울 라이브 아이돌 페스티벌을 운영하고 있다. 앞으로 이 문화는 단순한 공연을 넘어 팬과 아이돌이 함께 만들어가는 독자적인 문화로 성장할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