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j-펑크의 역사를 알아보자!!

최근 한국 내에서 일본 음악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J-POP 아티스트들의 내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는데, ASIAN KUNG-FU GENERATION은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를 이유로 약 12년 만에 방한했고, 비슷하게 BUMP OF CHICKEN은 원더리벳 페스티벌을 이유로 약 17년 만에 방한했다. 최근 이어진 내한 흐름이 페스티벌에 의한 내한이다 보니, 자연스레 J-POP은 페스티벌에 적합한 음악으로 사람들에게 인지되었다. 우리가 페스티벌에서 이들을 맞닥뜨렸을 때 즐거웠던 것은, 장르의 차이는 있지만 이들이 어느 정도 펑크를 기반으로 이루어진 밴드이기 때문일 것이다. ASIAN KUNG-FU GENERATION은 초기에는 멜로딕 펑크 밴드를 지향하며 결성되어 형성 단계에서부터 펑크와 직접적인 연관성을 지니고, BUMP OF CHICKEN 또한 시모키타자와계 기타 록을 기반으로 한 팝 록을 하고 있기에 펑크와 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다. 그리고 이들을 벤치마킹하며 나온 후대 밴드들까지 있으니, 이토록 현대 j-rock의 기초에는 놀라울 정도로 펑크가 관여하고 있는 부분이 크다. 2000년대의 음악 세대를 일본에서는 AIR JAM 세대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 AIR JAM이 라우드계(펑크, 혹은 메탈계) 페스티벌이었던 것임을 생각해본다면 일본에서의 펑크의 위상이 상당함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이번 기회를 빌려, 이 j-punk의 계보를 따라가보고자 한다. 이왕이면 모두가 좋아해줬으면 좋겠다.
1. 1970년대
이야기에 앞서, 펑크란 무엇인가. 펑크는 DIY(Do It Yourself) 정신을 강조하는 음악으로, 반 체제적이고, 반동적이다. 거기에 3가지 코드를 기본으로 사용하여 창작되는 음악이기에, 작곡의 난이도도 다양한 박자나 음계를 건드리는 매스록이나 노이즈록에 비하여 전적으로 쉬운 수준이다. 누구나 할 수 있다는 평등주의적인 정신을 내세우고, 3가지 코드만을 사용해서 음악을 만들기에, 펑크록은 음악이 배운 자들의 전유물이라는 사상에 전적으로 반하는 음악이다. 펑크의 음악적인 특징은 3가지 코드만을 활용하여 작곡된다는 점 외에는 달리 없었기에, 이를 음악적 기조로 구분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따라서 펑크는 반사회적이고 반골적인 문화 전반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1970년대 초반에는 전 세계적으로 펑크라는 장르가 정립되지 않았던 상태였다. 그러나 아직 펑크라는 단어가 존재하기 이전에도 록 음악은 존재하고 있었고, 일본에도 비틀즈의 음악이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점차 록 음악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이 당시 일본 음악계에는 주요 논제가 있었는데, 이는 일본어로 된 록 음악의 성공 가능성에 대한 논의였다. 일본어로 된 록이 성공할 수 있다는 주장은 상대 록 파로, 일본어로 된 록이 성공할 수 없다는 주장은 절대 록 파로 구분되었다. 절대 록 파의 이야기는 비틀즈 음악을 그대로 살리는 커버 음악으로 이어졌고, 상대 록 파의 이야기 또한 비틀즈 음악의 번안곡으로 이어졌다. 그러한 논의 속에서 포크 밴드, 해피엔드(はっぴいえんど)가 등장했고, 성공하며, 논의는 상대 록 파의 승리로 일단락이 되었다.
1970년대 후반에는 전 세계적으로 펑크가 정립되어서, 뉴욕에서 런던으로, 런던에서 일본으로 전래되었다. 동 시기 일본에서는 이전 시대의 포크송이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포크를 듣는 사람이 없어진 상황에서, 펑크는 학생 운동을 했던 이들에게 포크 이상의 지지를 얻었다. 펑크는 상기했듯이 가성비가 좋은 음악이었기에, 누구나 따라하기 쉬웠고, 상대 록의 승리 덕에 복잡하게 영어로 작사를 할 필요도 없어졌기 때문에, 프릭션, 리자드, 미러즈 등의 펑크 밴드가 일제히 탄생했다. 이들은 스스로 컴필레이션 앨범을 만드는 등, 본인들을 도쿄 로커스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당시 펑크는 단순 존재하기만 했다의 수준이지, 전부 언더그라운드 인디에서의 활동이었기 때문에 음악계에 큰 파동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2.1980년대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전반에 이르기까지, 사잔 올스타즈와 BOØWY를 주축으로 하는 밴드 붐이 시작되었다. BOØWY 이후의 록 밴드들이 상업성을 강조하며 기존에 있었던 저항정신을 잃고 유명해졌는데, 펑크는 이와는 반대로 기존 체제에 반하는 반동적이고 악동같은 활동, 즉 저항정신을 강조하며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예시로, 그 무렵 펑크 판에서는 엔도 미치로가 이끄는 스탈린이 언더그라운드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들은 라이브 하우스에서 잘린 돼지 머리를 관객에게 던진다거나 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고, 그런 행동들이 실로 ‘펑크’적이라고 인식되었는지, 스탈린은 언더그라운드에서 상징적인 성공을 이루었다.
스탈린의 리더인 엔도 미치로는 20대 때 여러 학생 운동에 참여했던 만큼 급진 좌익 활동에 대해서 호의를 지니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러시아를 비롯한 공산권 국가 여행이나 정치적 금기에 대한 관심 또한 갖게 되었다. 그렇지만 엔도 미치로가 공산주의자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반골 기질이 강했기에 단순히 현 체제를 비난하고 싶었을 뿐이고, 공산주의를 찬양할 마음은 없었다. 그는 체제에 의해서 입으로 뻥긋 내뱉을 수도 없는 말이 하나, 둘 늘어가는 현상을 안타까워했고, 이에 도발적인 시도로 밴드명을 스탈린으로 짓게 되었다.
스탈린을 비롯한 인디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이 라이브 하우스에서 좋은 모습들만(상업적으로)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밴드 붐에 의해서 전국 각지에 라이브 하우스들이 증가하기 시작했고, 너도 나도 밴드맨을 지향했다. 거기에 더해서 80년대 후반에는 음원 시장이 레코드에서 CD로 넘어가기 시작했고, 대량 생산을 거친 CD는 레코드에 비해 단가 자체는 비슷했지만, 내구성면에서 이익이 있었기에 음악을 청취하는 것이 이전 시대보다 더 편리해져서 관심을 받기 쉬워졌다. 또 대량생산화를 통해서 악기의 가격 또한 저렴해져서 그야말로 밴드맨이 되기에 최적인 시기가 되었다. 펑크의 폭발적인 음향은 라이브 하우스에서 좋은 수익을 내는 흥행 보증 수표로 인식되었고, 펑크에 대한 대중의 인식 또한 나날이 좋아졌다. 아니, 록 음악 자체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졌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밴드 붐 시기 라이브 하우스의 증가와 펑크의 폭발적인 라이브 흥행 보증은 펑크 록에 있어서도 호재라고 볼 수 있었지만, 문제는 라이브 하우스의 수보다 밴드 붐에 의해 탄생한 밴드의 수가 더 많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많은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은 라이브할 장소를 찾지 못하고 길거리로 나앉았다. 이때 하나의 대안적인 장소로 떠오른 곳이 하라주쿠의 보행자 천국이었고, 많은 밴드들이 보행자천국, 호코텐(歩行者天国, ホコ天)에서 공연했다. 정통 펑크를 대중적인 언어로 해석한 블루 하츠 또한 이 호코텐 출신이었다. 블루 하츠는 호코텐을 거쳐 곧장 메이저 데뷔했는데, 적당한 속도의 심플한 펑크록이지만, 팝적인 멜로디가 섞여 있었기에 더 듣기 쉬웠고 대중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스탈린 당시에는 일반 대중이 펑크를 찾아 듣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블루 하츠는 펑크 향유층을 넘어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큰 호평을 얻었고, 이에 일본 내에서 펑크의 입지는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펑크의 인식이 좋아지니, 장르는 각자가 옳다고 생각한 방향으로 다분화되기 시작했다. 펑크는 3가지 코드에 단조롭다면 단조로운 음악이고, 이를 특징적으로 분류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따라서 펑크는 음악이기 이전에 침을 뱉거나 욕설을 거리끼지 않는 반동적인 행동 양상과 이를 반영한 패션까지 총합한 문화 전반으로 보아야만 한다는 의견이 존재했다. 이들은 영국의 펑크 밴드 섹스 피스톨즈를 우상으로 삼고, 반항적인 태도와 패션 등등, 음악적인 기조를 거의 변함없이 유지하며 펑크의 상징성을 강조했다. 하필이면 왜 섹스 피스톨즈였는가. 섹스 피스톨즈는 음악적으로는 기존의 펑크와 비슷한 양상을 보였지만, 태도적으로나 패션 부분 등 시각적인 부분에서나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이를 강조한 펑크밴드였기 때문이다. 섹스 피스톨즈는 펑크는 문화 전반이라는 자들에게 바이블로 소비될 만한 존재로 부상했고, 고로 정통 펑크파는 섹스 피스톨즈를 우상으로 삼게 된 것이었다. 반면 펑크는 문화가 아닌 음악 기조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이들은, 단조로운 음악 구조 자체를 개편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펑크가 라이브에서 주는 에너지와 힘에 주목해서, 더 강렬한 음악을 만들고자 하였고, 이에 기존보다 더 빠르고, 더 공격적이고 과장된 연주 방식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하드코어로 발전했고,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은 서구의 하드코어 펑크를 음악적인 기반으로 삼았다.
어찌 보면 정통 펑크가 순혈을 고집하며 고립을 선택한 것에 반해, 하드코어 펑크는 방향이 어떻든 일단 나아가기로 선택한 것이다. 고립이라 적었던 것과 같이, 정통 펑크는 펑크의 상징성을 강화하는 것을 꾀했으나, 실상은 안에서부터 고착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고착화는 펑크에서 강조하는 반골 기질과 DIY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므로, 이후 점차 쇠퇴를 맞았다. 그리고 정통 펑크가 사실상 사라지는 수순을 밟기 시작한 시점부터 모순적이게도 기존 펑크에서 볼 수 있었던 상징성은 점차 옅어졌다.
3. 1990년대
90년대에는 보행자 천국의 밴드들이 발전하여 펑크록과 비주얼계 록이 공존했다. 보행자 천국에서 선보여졌던 음악들은 대개 기존 펑크나 메탈와 비슷한 형태거나 이를 과장한 형태였으므로, 음악적 특징은 당연히 후대의 펑크와 메탈로 이어졌다. 또 이 당시 대부분의 밴드가 과한 화장과 파격적인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시각적 특징은 비주얼계 록으로 이어졌다. 이 둘이 대부분의 록 음악을 점유하고 있을 정도로, 일본 록 음악은 전 시대와 다른 언어의 음악이 탄생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이런 시류는 멜로딕 하드코어와 멜로딕 펑크에 의해 뒤바뀌기 시작했다.
90년대 이후 일본에 얼터너티브 록이 들어오게 되면서 펑크는 얼터너티브 록과 결합하기 시작했고, 특유의 멜로디컬함이 펑크와 결합되며 멜로딕 펑크가 탄생했다. 멜로딕 하드코어 또한 비슷한 맥락으로 얼터너티브 록이 하드코어와 결합하며 탄생했는데, 사실 정통 펑크는 이 무렵 사실상 찾아보기 힘든 수준으로 변화해 두 장르 모두 뿌리가 비슷하고 음악적으로 기조 또한 비슷하기에 따로 구분은 않겠다. 실제로 두 장르는 일본 내 청취자들 사이에서도 무엇이 다른지 명확한 구분법이 존재하지 않아서, 한 밴드에 대해 어느 매체에서는 멜로딕 하드코어로, 어느 매체에서는 멜로딕 펑크로 기재하는 일이 많기도 하니, 이 부분은 구분이 무용하다 생각된다. 초기 얼터너티브 록은 디스토션을 먹인 강렬한 기타 리프와 단순한 곡 구성이 특징으로 당시 주류 음악이었던 헤비 메탈에 반하여 탄생한 장르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조를 펑크가 받아들인 시점에서 펑크는 쉬운 음악이라는 인식이 완전히 소실되었다. 3코드 DIY 정신은 다소 차치해둔 형태로, 기타의 리프 구조도 더 복잡하게 바뀌었으며, 전적으로 멜로디컬함에 집중하는 형태가 되었다.
멜로딕 펑크는 80년대의 라이브 하우스 수의 증가와 맞물려서 도쿄도 세타가야구 소재의 시모키타자와를 중심으로 빠르게 발전했다. 시모키타자와의 라이브 하우스를 중심 무대로 활동하던 펑크밴드들은 당연하게도 라이브 현장에서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원했고, 이는 멜로딕 펑크의 융성으로 이어졌다. 멜로딕 펑크가 융성하던 시기에는 상기했던 상대 록과 절대 록의 논쟁이 재점화되어 서양의 록 음악만이 진짜 록 음악이라는 양악지상주의가 펼쳐지고 있었으므로, 멜로딕 펑크 밴드는 가사를 대부분 영어로 작성했다. Hi-standard를 기점으로 해서, 일본 록에는 그야말로 멜로딕 펑크 바람이 불었고, 이는 후대 밴드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990년대 후반에는 페스티벌 문화가 확산되기 시작했고, 음악을 단순히 듣던 시대에서 직접 체험하고 즐기는 시대로 변했다. 특히 FUJI ROCK FESTIVAL을 비롯한 여러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로 thee michelle gun elephant가 등판하면서 좋은 모습을 보였고, 이에 펑크를 비롯한 록 음악은 페스티벌 음악으로 입지가 굳어지기 시작했다. 펑크 밴드의 활약장이 늘었다는 것은 씬에 있어서 엄청난 호재였지만, 그에 반해서 펑크는 더더욱 상징성을 잃고 라이브에서 어떻게 하면 관심을 받을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는등, 이전 시대의 펑크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4. 2000년대
2000년대에 이르면서, Apple에서 아이튠즈를 만들었고, 음악의 청취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기 시작했다. 거기에 아이팟도 생기면서 음악의 청취는 급속히 피지컬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하기 시작했고, 착신 음악 서비스가 생김에 따라 음악은 이제 온전히 청취자의 입장에서 좋은 것만 골라들을 수 있도록 변했다. 따라서 문화는 청취자 중심으로 옮겨갔고, 주요 청취자의 계층도 보다 어린 나이인 청소년을 비롯한 학생으로 옮겨갔다. 페스티벌 문화도 이에 한몫을 했다. 당시 청소년들과 젊은 청년의 경우는 삼보마스터나 긴난보이즈와 같은 청춘 펑크에 열광했다. 특히나 당시 컬트적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전차남의 삽입곡으로 삼보마스터의 <世界はそれを愛と呼ぶんだぜ>가 사용되면서 이 인기는 절정을 찍었다.
청춘 펑크는 대게 멜로딕 펑크에 영감을 받아서 멜로딕 펑크의 리듬 위에 솔직한 가사를 얹은, 펑크의 밑 장르 중 하나였지만, 펑크 자체의 마음가짐을 버리고 청춘을 노래하는 청춘 펑크를 멜로딕 펑크 씬에서는 그리 선호하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청춘 펑크의 카운터로서의 의식이 어느 정도 있었던 것으로, 비슷한 문법으로 사랑과 청춘을 노래하는 청춘 펑크에 대항해서, 멜로딕 펑크는 사랑을 하더라도 비관적이고 냉철하거나 하는 형태로 노래를 짰다. 그러나 일반 대중의 시점에서 멜로딕 펑크와 청춘 펑크는 사실상 별반 차이가 없는 장르로 두 장르 모두 이 당시 인기를 끌었다. 구분점 또한 모호했기 때문이었는데, 청춘 펑크와 멜로딕 펑크를 구분짓는 특징은 쓰여진 언어가 무엇인지 묻는 것이 제일 대표적이었다. 멜로딕 펑크는 영어이고, 청춘 펑크는 가나문자로 되어있다는 이 분별법은 영어와 일본어 모두 작사에 사용하는 MONGOL800 등의 존재로 인해 그마저도 큰 효력이 없었다.
이 당시 유행했던 멜로딕 펑크 계열 밴드들은 도쿄의 시모키타자와에 진을 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음악 잡지사 록킹온의 잡지에 의해서 시모키타자와계가 주목받기 시작하며 멜로딕 펑크 붐 또한 더욱 커졌다. 이들과 이들에게 영향을 받은 후대 밴드는 ‘록킹온계’라는 이름으로 묶였고,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밴드들이 록킹온의 영향권 아래 있으니, 실로 그 영향력이 커지게 된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서 90년대 이후 위축되었던 하드코어 펑크와 그의 파생작인 스크리모, 이모 또한 메탈과 함께 라우드계라는 이름으로 묶였고 메탈을 청취하는 팬도 일부 흡수하며 나름의 인기를 누렸다.
5. 2010년대
2010년대에 이르자 펑크는 더 이상 하나의 명확한 장르로 인식되지 않았고, 하나의 기능으로 변했다. 대중이 음악을 즐기는 형식이 페스티벌이나, 라이브 현장으로 고착되면서, 음악은 더 이상 장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들었을 때 즐거웠나의 여부의 구분법으로 인식되었다. 또 피지컬 CD의 판매량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음악의 청취가 전적으로 온라인에서 이루어지게 되며 밴드의 수입은 라이브와 같은 현장에서 얻어내는 것에 의존적이게 되었고, 이에 라이브 현장이나 페스티벌에서 인기를 끌기 위해 많은 밴드들이 혈안이 되었다. 이 시점에 이르러서 펑크는 이전 시대에 볼 수 있었던 반골적인 태도를 잃었고, 라이브에서 성공해야만 한다는 기이한 사명감을 지니게 되었다.
더불어 멜로딕 펑크와 시모키타자와계의 영향을 받은 ‘록킹온계’ 음악이 승승장구하면서, 펑크는 더욱 널리 퍼졌지만, 대신 의미나 장르의 특징이 희석되었다. 더불어 록킹온계의 음악이 성공하기를 반복하니, 대중적인 펑크는 멜로딕 펑크 계열을 제외하고는 몇 남지 않게 되었다. 이는 펑크가 촌스럽다거나, 그런 논의 속에서 진행된 소외가 아니라, 철저히 펑크의 기능이 다른 여타 밴드로 흩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특색이 사라졌고, 그 탓에 소외된 것이었다.
그러한 흐름 속에서 BiSH가 등장했다. BiSH는 악기 없는 펑크 밴드를 슬로건으로 내건 아이돌로, 아이돌 중 흔치 않게 펑크를 주 무대로 다루던 아이돌이었다. BiSH는 기존 아이돌 전성 시대의 마케팅법에 반하는 마케팅 방법과 페스티벌이나 라이브를 주 무대로 활동한다는 점에서 실로 이전 시대의 ‘펑크적’이란 말에 어울리는 아이돌이었다. 라이브 현장과 페스티벌은 펑크를 다시 한번 전성기로 부활시키지는 못했지만 가시계에서 사라지지는 않게 해주었고, 펑크에 영향을 받은 후대 아티스트들에 의해 펑크는 나름의 입지를 지켰다.
이상과 같이 1970년대 펑크의 발단에서부터 2010년대 비교적 최근까지의 계보를 모두 훑어보았다. 2020년대는 아직 진행중에 있어서 계보를 작성하기엔 다소 조심스러웠음을 밝히며 이에 양해를 구한다. 요약하자면 펑크는 일본 내에서 꾸준히 다분화되며 발전을 거듭해왔고, 후대 밴드들은 ‘록킹온계’ 음악이라는 이름으로 이를 발전시켰다. 다만 여타 음악이 그렇듯, 펑크 또한 시간을 거치며 장르 자체가 가지는 특성을 잃어가는 방향으로 발전했고, 그러한 면에서는 어쩌면 펑크라 보기 힘들어진 것 또한 맞다. 하지만 페스티벌이나 라이브에 의해, 펑크에 새로운 정체성이 부여되었고, 우리가 이를 즐기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기에 무엇이 좋고 나쁘다의 가치 판단은 하지 않도록 하겠다. 필자는 본인이 즐기고 있는 음악의 역사를 알면, 어쩐지 소리가 더 좋게 들리기도 하는데, 이 글을 감상하는 모든 이들도 j-rock을 들을 때 이 글이 한 번쯤은 생각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글을 마친다.
최동아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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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기, 4만 5천여 록 마니아와 함께한 펜타 1일차... 장기하·크라잉넛 등 화려한 무대 선보여 [2025 인천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2025.08.01, https://www.kyeonggi.com/article/20250801580220 (최종 검색 일자 2026.0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