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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오타쿠란 무엇인가: ‘진심’의 무게를 재는 저울은 없다
1. 들어가며
최근, 대중적인 인기를 끄는 ‘대중픽’의 애니메이션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대중픽(대중+Pick)이란 매니악하기보다 대중이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을 의미한다. 애니메이션 취미가 오타쿠들의 문화라는 인식과 별개로 비오타쿠도 대부분 알고 즐기며 이에 거론되는 작품들을 본다고 해서 ‘와 너 오타쿠네’와 같은 이미지가 특별히 생성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이에 따라 기존의 오타쿠 팬덤의 일각에서는 “인싸들이 우리 문화를 빼앗아 갔다”라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과거 오타쿠 혹은 서브컬처를 좋아하고 덕질하는 집단과 그들의 문화는 소수끼리 즐기고 나누는 문화로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지금은 극장과 각종 OTT 플랫폼 내의 순위에는 각종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꾸준히 이름을 올리고, SNS에서도 수많은 인플루언서와 유저들이 거리낌 없이 자신의 덕질을 공유하기도 한다. 이제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같은 서브컬처는 더 이상 ‘비주류’라고 보기엔 어려워진 것이다.

(이미지 출처: CGV 공식 사이트)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픽’ 작품을 통해 유입된 이들을 보며, 기존의 헤비 팬·오타쿠들은 종종 상실감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냥 유행해서 보는거 아님?”, “제대로 알지 도 못하면서 좋아하는
척하네”라며 선을 긋기도 하고, “이 애니메이션도 안 봤으면서
오타쿠라고 할 수 있나?”, “굿즈에 이 정도 투자는 해야 찐(진짜)팬이지”와 같은 여론을 SNS를
서핑하다보면 심심치 않게 마주할 수 있다. 작품을 좋아하는 순수한 마음 보다는, 그 자격을 증명해야만 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어떤 작품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따라오는 질문들이 있다. 어디까지 봤는가, 설정은 얼마나 아는가, 굿즈는 있는가, 등등 이렇게 어쩌면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질문일 수 있지만, 또 어찌보면 묘하게 선을 긋는 듯한 역할을 한다. 후자의 입장에서 보면 해당 질문들을 통과하면 ‘찐’, 그렇지 않으면 ‘패션오타쿠’, ‘가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문제점은 기준이 너무 제각각이라는 것이다. 오타쿠라고 해도 분야가 다 다르고 작품을 소비하는 방식도 사람마다 다르다. 애니를 좋아하는 사람,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 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 등 분야의 다양성이 존재하고, 굿즈를 모으는 사람도 있고, 2차 창작을 중심으로 작품을 소비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굿즈에는 큰 관심 없이 작품을 감상하는 그 자체만으로 만족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필자는 어느 쪽이 더 오타쿠다운지를 묻는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본다. 따라서 취향의 영역에서 '진짜'와 '가짜'를 나누는 것이 왜 무의미한지, 그 이유를 짚어보고자 한다.
2. 인싸들에게 ‘빼앗긴‘ 오타쿠?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오타쿠를 ’빼앗겼다‘라고 표현하는데, 이 부분에 주목하겠다. 이 표현엔 이상한 전제가 깔려 있다. 유명한 작품들만 보고 오타쿠라고 지칭하는 것을 보고 오타쿠를 빼앗겼다라고 하면, 덜 알려진 작품을 좋아해야만 ’진짜‘ 오타쿠라 는 것인가? 마치 유명한 작품만 좋아해선 안 된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듯하다.

(유튜브에 ‘패션오타쿠’, 구글에 ‘오타쿠 구별법’이라
검색하면 상단에 뜨는 화면이다. 알게 모 르게 우리는 계속 진짜과 가짜를 나누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작품을
좋아하게 된 계기가 유행이든, 누군가의 추천이든 그 자체는 딱히 중요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그 작품을 보고 즐겼고, 깊이의 차이는 있겠지만
작품을 감상하는 과정에서 마음이 움직였다는 것이다. 설령 진짜 소위 말하 는 ’인싸‘들이 오타쿠를 ’빼앗으려‘고 겉핥기식으로 좋아하는 척을 했다고 한들, 특정 캐릭터를 혐오하는
컨텐츠가 아닌 이상 애니나 캐릭터의 이미지에는 별다른 타격이 없다. 물론 대중픽으로 유입된 이들을 바라보며
기존 헤비 팬들이 상실감을 느끼는 것 자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오랜 시간 비주류라는 시선 속에서 ’나만의 아지트 ‘처럼 가꾸어 온 것이 어느 날 갑자기 유행을 타며
가벼운 소비의 대상이 되어버린다면 그야말로 빼앗긴 기분이 들 것이고 그 때의 박탈감은 결코 작지 않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저 오래, 넓게, 깊게 알았다는 사실이 애정을 독점하고 서열화 할 수는 없다. 아지트에서
관광지가 되었다는 것은 그곳이 누구나 방문하고 싶어 할 만큼 매력적인 곳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필자의 입장을 말하자면 대중픽은 단순히 운이 좋아 유명해진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취향과 감정선을 충족시키고 그들에게 닿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중픽 장르는 서브컬처의 문화의 밀도가 낮아지고 헤비 팬보다 라이트 팬이 많아져 작품을 향한 진심의 농도가 옅어졌다기보다는 오히려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게 되어 ’애니메이션은 아이들이나 방구석 오타쿠나 보는 것이다‘라는 일종의 편견을 깨뜨리고 장르의 가치를 높여주었다고 생각한다.
3. 그렇다면 헤비 팬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일단, 어떤 것이든 그 작품을 좋아하고 즐긴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대중의 유입은 장르의 생명력을 연장하는 강력한 동력이다. 그런데 오타쿠를 빼앗겼다고 지칭하며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팬덤과 자신들의 덕력을 지키기보다 스스로를, 나아가 장르 자체를 다시 작게 만든다.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라이트 팬이 있는 것이 반갑다. 아직 모르는게 많다는 것은 그만큼 앞으로 즐길 거리, 즐길 여지가 많다는 뜻이고 헤비 팬의 입장에서 라이트 팬이 원한다면 이것저것 떠먹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 장면이 좋았다든가, 특히 이 캐릭터가 어디에서 뭐하는 것이 인상깊었다 든가, 설정이 흥미롭다든가 등등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덕질의 재미라고 생각한다. 헤비 팬이라면 라이트 팬을 밀어내기보다 약간의 책임감은 가져도 좋지 않을까. 여기서 말하는 헤비 팬의 책임감이란 장르의 발전을 위해 일종의 가이드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라이트 팬은 아직 즐길 거리와 감동할 여지가 많이 남아있다. 따라서 그들이 원한다면 내가 처음 이 장르에 빠졌을 때 느꼈던 경이로움, 벅찬 감정들을 그들도 같이 느낄 수 있도록 덕력을 나누며 내가 사랑하는 장르가 더 오래 도록 빛나게 만드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가장 성숙한 덕질의 자세이자 애정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4. 마무리
이러한 생각은 내가 야구팬이라는 점을 대입하며 더욱 확고해졌다. 필자도 누가 뭐라하면 서운할 야구 오타쿠, ’야빠‘이다. 하지만 매 경기를 챙겨보는 편도 아니고, 비시즌엔 솔직히 말해 거의 관심없이 살 때도 종종 있다. 이런 나를 보면 시즌 비시즌을 나누지 않고 야구를 즐기는 헤비 팬의 입장에서 팬심 즉, 덕력이 낮아보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팬이 아닌 것은 절대 아니다. 수년간 야구를 보며 희노애락을 느껴왔고, 비시즌에는 관심이 식어도 다시 시즌이 시작되면 또 다시 돌아온다. 서브컬처에서의 오타쿠 문화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타쿠력‘이라는 말에도 크게 공감하지 않는 편이며, 덕질에 점수를 매길 수는 없다. 얼마나 오래 좋아했고, 얼마나 많이 소비했고, 또 얼마나 깊이 파고들었는지는 개개인의 선택인 것이다. 그걸로 누군가를 판단하거나 서열을 나눌 이유는 전혀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태도이다. 누가 더 진짜인가를 가려내는데 에너지를 쓰기보단, 어떻게 다같이 즐길 것인가를 고민하는게 훨씬 생산적이고 건강한 오타쿠 문화를 만들 수 있다. 필자에게 ’그럼 당신에게 있어서 진짜 오타쿠란 무엇인가?‘라고 물어보면 이렇게 답하고 싶다. 그냥 그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ハチ - 砂の惑星 feat.初音ミク MV 中)
한수영
